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라는 존재는 슬플 정도로 한심하고 쓸모 없는 존재라고 세상이 늘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살아갈 힘 따윈 없었다. 살아갈 의지 따윈 당연히 없었다.
그저 숨을 쉬고 있으니 살아갈 뿐이었다. 살아있으니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게나 가치 없는 목숨이었고 의미 없는 인생이었다.
언제라도 죽는다면 마음 속 깊이 환영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누군가 물어볼 것 같다. 자살은 생각하지 않았냐고.
생각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다면 편할 거라고 몇 번이나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해선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그가 살려준 이 목숨을 버리는 짓을 하는 것은 죽어서도 그를 볼 면목이 없어지는 일이니까, 나는 그저 살아갔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젊은 날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쭐하던 시절이 그립기까지 하다. 그 무렵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
어릴 때부터 그림이 좋았다.
우리 집은 잦은 이사로 인해 나는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고, 그것에 굳어져 20살이 될 때까지 내게 친한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굳이 있다면 스마일이라 이름 붙인, 6살 생일 선물로 받은 곰돌이 인형만이 내 유일한 말벗이었다.
사교성이라는 것은 천성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인 것을 예나 지금이나 알고는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아니, 지금도 여전히 사교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뚝뚝한 여자지만 당시의 나는 그러한 것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리 속에 끼어들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순수한 만큼 잔인하다. 용기 없고 겁 많은 나는 전학을 가는 곳 마다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 결핵에 걸려 학교를 장기간 빠질 땐 아파서 괴롭다기 보단 학교를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바깥 세상이 무서웠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외부의 세계를 모두 단절 시킨 채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얼마나 붓을 휘둘렀는지 굳이 세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정신을 차린 시점에서 보자면 수 년은 흘렀다.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명확한 목적은 없었다. 단지 현실이 무서우니까,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무언의 속삭임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으니까. 유일하게 좋아하던 그림의 세계로 끊임없이 도피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쪽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친구 분이 놀러 오셨다가 우연히 내 그림을 발견하시고는 나를 미술 세계로 거둬주셨다. 그때의 내 나이는, 학교를 다녔다면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천재 소녀라는 타이틀로 그림을 팔아 치우고 있었다. 이때의 내가 무엇을 어떠한 심경으로 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저마다 알아서 멋대로 내 심상을 해석하고 떠벌렸기 때문에 나는 귀찮음을 덜 수 있었다. 그렸다는 의식도 없이 그린 그림에 멋대로 의미 부여를 해주니 나름대로 편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그렸던 그림 덕분에 이 세계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였지만, 나에 대해 거론할 때 사람들은 모두들 천재라고 해준 덕분에 우쭐해진 나는 조금이나마 자신감 비슷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치들이 멋대로 떠드는 소리가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내 의도를 가지고,내 그림의 방향성을 놓고 불평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그림의 세계로 도망쳤다. 그것만이 유일한 안식이었으니까, 이 무섭고도 괴로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서 나라는 인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도피 행각은 영원히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23살이 되던 어느 봄 날의 일이었다. 그 일은 말로 풀어보자면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별 거 아닌 일이었다. 그리고 말로 풀어버리는 만큼 내가 느꼈던 허무함과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영원할 것 같던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과 동시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특별한 계기가 될 만한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다. 그저 문득 정신이 들어버렸다…라고 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려왔던, 거의 평생을 함께 해왔던 그림 그리는 법을 잊어 버렸다. 붓을 들고 버릇처럼 손을 대어도 붓이 나가질 않았다. 어떤 식으로 영감을 얻어서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전부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오히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슬픔도 분노도 기쁨도 없었다. 감기라도 걸린 기분으로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점차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내 목을 조여왔다.
“하…하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흐…흑….흐흐흑…”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이 세상에서 살아도 되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일까. 뜨겁게 달아오른 내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누구라도 좋아.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사람.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줄 사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숨 쉬기가 괴로웠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어버릴 것만 같았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에 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에 유일하게 저장 되어있는 번호, 나의 부모님에게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나를 필요하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전원이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그러나 해외여행을 떠난 부모님의 휴대폰에 전화가 연결될 리 없었다. 그 여행을 보내드린 게 나 자신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을 떠올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절망했다. 존재 가치가 없어진 나 자신에게,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이 세계에.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 샌가 나는 아버지 친구분이 소유한 화랑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서 오렴.”
아저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환한 미소를 띄며 날 맞이해주셨다. 화랑 1층에는 내 그림으로 가득했다.
“……”
“오늘은 어쩐 일로 왔니?”
“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살아도 되는 걸까요?
“응?”
…물어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아니에요.”
“녀석, 싱겁긴. 천천히 쉬다 가렴.”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역시나 나를,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나를 필요로 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오랜 세월 잠들어있던, 자살에 대한 욕망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깨어나 내 몸을 간지럽혔다.
그것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그 유혹에 넘어가려 했지만 그림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진 지금의 나로선 이 무서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다른 수단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주마등이 보인다고 하던데, 적어도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 설 때까지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면 후회나 집착이 생긴다던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 되려 마음이 차분하게, 편안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젠 편해져도 괜찮겠지. 눈앞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빌딩들이 마치 거대한 괴물 같았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이 무서운 세상과 멀어져도 될 테니까. 괜찮아. 나는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왕 할 거면 기분 좋게 죽는 게 낫지 않겠어?”
절묘하게, 내가 눈을 감고 뛰어내리기 세 걸음 전에. 등 뒤에서 나를 방해하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투신 자살은 말이야. 시각적으로 덜 잔인해 보여서 영화 같은 데서 자주 쓰이는 연출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고통스럽다는 거 알아? 낙하 도중 심장마비로 죽는 게 투신자살의 목적인데, 이정도 높이라면 심장마비까지 가지도 못하고 추락 한 채 파괴 당해서 죽고 말 거야.
온몸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의식은 남아있는 채로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괜찮겠어?”
듣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묻지도 않는 말을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남자의 말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조금 전까지 안식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았던, 나의 죽음에 대한 갈망이 더럽혀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
“더 얘기해줄까?”
남자는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필요 없어.”
기분 나쁜 태도를 감추지 않은 탓 일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말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결심이 더 약해지기 전에, 살아 봐야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에 얽매여서 자살을 할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뛰어내리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나 그마저도, 어느 새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그가 온 몸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실패했다.
“…! 놔! 놔요!”
“웃기지 마!”
나를 난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까지 끌고 온 그가 소리쳤다.
“멍청한 짓 좀 작작해! 한 번 말려줬는데 기어이 뛰어내리겠다고?! 살고 싶어도,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고 안간 힘을 다 해도 죽는 사람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라도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다가도 끝내 죽어버리는 사람들의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넌 뭐 하는 놈이야!!”
내 인생에 있어서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나에게 이만큼이나 강렬한 감정을 터뜨리며 나를 걱정해준 것은 그 뿐이었다.그래서일까,
“그렇게까지 괴로워할 만큼 중요한 인생이라면 살아! 포기하지 말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 남으란 말이야!”
생판 모르는 나를 위해 진심으로 화를 내주는 그에게 감화되어버렸던 걸까.
나는 울어버렸다.
“흑…흐흑….”
“네가 누구고,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는 몰라. 하지만, 네가 하려던 행위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야. …네가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 죽는 건 그만 둬.”
내 몸에서 저항하던 힘이 빠진 것을 느꼈는지 그는 손을 놓아주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 앉아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흑…그…그럼…훌쩍. 어…어쩌란, 흑… 어쩌란 말이야…”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말 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아무도…훌쩍. 아무도 피…필요치…”
숨을 쉬는 것 조차 힘들었고, 말을 잇기가 괴로웠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말 하고 싶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한 내 진심을 고백해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흑, 이 세상에서 아무도… 훌쩍. 아무도 나를…읏…으읏…”
힘을 내서,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다 말해야… 다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에 눈앞의 남자는 조용히, 부드럽게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울어도 괜찮아.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
남자의 말에, 주체할 필요가 없어진 눈물이 정처 없이 흘러 나왔다. 내 안에 가득 차있던 말로 형성되지 않은 마음과 함께, 아직은 조금 쌀쌀한 이른 봄 바람을 맞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후련해질 정도로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일 분, 아니 십 분… 어쩌면 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서 처음 울어보는 듯한 기분으로, 이때가 아니면 더 이상 이렇게 울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지칠 때까지 울었다. 그 결과로 힘이 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지만.
“한지호, 27세. 보다시피 남자야. 잘 부탁해. 아가씨.”
“…..훌쩍.”
“아직 더 울고 싶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방금 전의 훌쩍임은 더 울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치기 위했던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아뇨.”
“응, 아까보다는 훨씬 좋은 표정이네. 조금은 후련해졌어?”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석양이 눈부셔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인자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이름이라도 알려줄 수 없을까? 곧 들어 가봐야 하거든.”
“…혜은, 윤혜은.”
“오케이, 저장 완료. 나는 이 화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다음에 지나가면 들러줄 수 있겠니? 적어도 내가 구한 사람이 다시 만날 때까진 살아있다는 것은 확인하고 싶으니까.”
나는 말 없이 끄덕였다.
“좋아, 그럼 먼저 실례할게. 조심해서 돌아가렴. 아, 그 손수건은 돌려주지 않아도 돼.”
내 등을 작게 다독여준 뒤 그는 화랑으로 이어진 옥상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
결국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텅 비어버렸을 거라 생각한 몸 속에, 따듯하면서도 마음을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요동치는 듯한 감각 때문에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스마일, 나… 이상한 기분이 들어.”
늘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소중한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잠이 오질 않아…”
평생토록 남에게 못한, 내 모든 마음을 듣고도 내 곁을 떠나주지 않는 유일한 친구. 그런 점이 좋았다. 어떤 말을 해도 스마일은 상처 받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날 만큼은 처음으로 스마일도 내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내 감정을 이 과묵한 친구가 대신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아까와는 너무나… 다른 기분이 들어.”
늘, 언제나 한결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친구에게 순간적이지만 야속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불만인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친구의 야속함과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자, 스마일.”
내일 눈을 뜨면 그를 만나러 가자. 그리고 고마웠다고 전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랜만에 평온한 꿈을 꾸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외출 준비를 하고 화랑으로 갔다.
“오, 또 왔네. 그림 정말 좋아하나 봐?”
“…으응.”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있었고, 너무나도 온화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제대로 된 인사말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그런 실망감 보다 더 큰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구나. 나도 정말 좋아하거든, 아 혹시 바빠? 한가하면 잠깐 기다려 줄래? 곧 쉬는 시간이니까.”
감사의 인사도, 손수건을 돌려주는 말 조차 하기 전에 속사포 같이 날아오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라는 말을 남기고 그가 일을 하러 돌아간 동안 무료해진 나는 1층을 서성이며 시간을 때웠다.
특별한 전시회가 있지 않는 이상, 평일 오전의 화랑은 대체로 한가했기 때문에 나는 이 공간이 좋았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명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님에도 고요함을 독차지 하는 감각이 마음에 든 탓이었다.
다만 지금은, 어제 밤부터 시작된 두근거림 때문에 화랑 안에 있어도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 가득해서.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진정되는 건지 몰라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오래 기다렸어?”
“에…아, 아뇨.”
“윤소월님 작품이네. 이 작가 분 그림 좋아해?”
내가 눈앞의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겠지. 그러나 나는 눈앞의 그림을 보지 않아도 어떤 그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음…싫어…하진, 않아요.”
싫든 좋든 내 작품이니까. 윤소월이란 이름은 필명을 정할 때 김소월님의 초혼에 감동 받아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렇구나. 이 작가 분은 나이도 나보다 어리다고 하는데 정말 굉장하지. 어떤 심상으로 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한 사람일 거야. 잘 표현은 못하겠지만 보는 사람이 우울해질 정도로 엄청나게 어두운 감성부터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따스한 감성까지 자유자재로 그리는 게.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면전에 대놓고 이렇게 과한 칭찬을 받으니 어떻게 반응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듣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저, 저어…”
“응? 왜 그래?”
“그…”
기세 좋게 운을 띄운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여태까지 단 한번도 타인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아, 이름은 편하게 지호라고 부르면 돼.”
“에, 그… 지호…씨.”
“푸핫!”
“…?”
그는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한참을 웃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지호씨는 좀 아니지. 아직 나는 어린 여자애한테 그런 말 듣고 태연하게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원숙한 사람이 아니라서.”
“…죄송해요.”
“괜찮아,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아, 하긴. 그렇구나, 너도 사교성 좋은 성격은 아니었겠구나.”
“그건 어떻게…?”
“나도 그랬으니까.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릴 정도면 낯가림이 심한 아이겠구나- 정도는 알 수 있고 말이야.”
“……”
“아, 미안. 놀릴 생각은 없었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긴장 풀어주려고 한 말인데, 내가 되려 실수한 건가?”
난처하다는 듯 살짝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마치 순수한 소년 같아 보여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후훗. 아니에요.”
“오, 웃었지? 방금. 살짝 이었지만 웃었지?”
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타인 앞에서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 사람하고 있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목숨을 구해줘서 일까? 아니,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라고 내 마음이 속삭였다.
“이러면 어떨까.”
“…?”
“아무리 봐도 나보단 어려 보이니까,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이름을 부르는 게 힘들면 인칭 대명사로 부르는 게 편하겠지.”
“……………………”
“…힘들어?”
“………..”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고,
“네…죄송, 해요.” 이윽고 사과해버렸다.
“아니야. 사과할 일이 전혀 아니야. 농담이야, 조크였어. 그, 그보다 아까 하려던 말은 뭐였어? 나한테 뭐 궁금한 일이나 묻고 싶은 거라도 있었어?”
“아, 네. 다른 게 아니라. …그림, 좋아하세요?”
그림 그리시나요?를 묻고 싶었는데 왜 내 입에선 다른 말이 나오는 걸까. 게다가 좋아한다는 건 아까 본인 입으로 했던 말인데.
“그건 윤소월님 작품에 관한 말이야? 아니면 그림 전부에 관한 거야?”
“…둘 다.”
“둘 다 엄청나게 좋아해.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도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이곳 오너가 윤소월 작가님과 친분이 있어서 그 분 그림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왔었던 거니까.”
반짝이는 그의 눈빛에서 그가 얼마나 그림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내 그림이 그에게 얼마나 인정 받고 있었는지도.
그래서 조금 흥분한 탓에 생각 없이 말을 해버렸다.
“당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싶어요.”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림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그림을 그리겠지. 그처럼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이 그린 그림은 아름다울 거란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결국 내가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는 쪽엔 재능이 없어서.”
쑥스러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조적인 감정이 섞여 들어간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있는 안타까움은 이런 나라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림을 포기해야만 하다는 건, 한 순간이나마 나를 자살로 몰고 갈 정도로 크나큰 고통이었으니까.그에게 있어선 어떻게든 아물어 가는 상처를 내가 찌른 것이나 마찬가지였겠지.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그림과 관련된 일이 하고 싶어서 화랑에서 일하며 길을 찾아가는 거니까.”
그는 멋쩍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무척이나 미안했다. 큰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다. 이 실례되는 행동을 사죄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풍경화도 좋아해요?”
“물론이지. 그런 구별 없이 좋은 그림은 모두.”
“그, 그럼… 별로 좋은 그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황급히 그를 이끌고 화랑의 구석으로 갔다.
이곳 화랑 1층 그림의 절반 이상은 내가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에 각 그림들의 위치는 잘 알고 있다. 그렸다는 기억 조차 없지만,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렸던 건 지도 잊어버렸지만... 그 중에서도,
“이거... 드릴게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그림이었다. 내가 그렸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따스한 봄의 풍경화. 유채꽃이 만발한 어떤 섬의 아름다운 풍경.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벽에 장식되어 있던 그 그림을 간신히 떼어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나를 바라본 그의 모습이 조금 인상적이었다.
“하하,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이러면 안돼. 화랑의 물건은 함부로 손 대면 안되고, 특히 이 윤소월 작가님 작품은 대부분 굉장히 인기가 있는 작품이라 농담으로 막 만질 수 있는 그림이 아니야.”
화랑의 점원 치고는 대단히 신사적인 반응이었다. (이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분명 당황했을 텐데도…
“그치만, 그림을 그린 사람이면… 그림의 소유자면 만져도 되지 않을 까요.”
“뭐, 그야. 그렇겠지… 어? 뭐라고?!”
“그…그러니까, 이거… 제 그림…”
“엥?!”
그는 여전히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기 위해 단숨에 말해버렸다.
“늦게 말해서 죄송해요. 그… 조금 부끄럽지만, 이 그림들 제가 그린 것들이에요.”
“에에에엑?!”
그의 놀란 목소리가 화랑 1층에 울려 퍼졌다. 사람이 놀라면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귀중한 날이었다.
어느 아름다운 날 - 下에 계속.










덧글
뒷편'ㅅ'!!
아니, 이젠 오늘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