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의 일이다.
나는 매해, 연휴가 낄 때 마다 엄청나게 몸이 나른해지는데 이번 설도 별 다를 바 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이대로는 이번 연휴도 그냥 날아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커피를 한 잔 타려고 부엌에 갔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건 나 개인적으론 너무나도 충격적인,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남과는 조금(아주 조금) 다른 인간인 것은 잘 알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인간은 성장 환경이 그 인간을 만드는데 가장 큰 원인을 차지하다 보니, 마치 유목민 같던 내 삶이 그것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까지 28년 인생을 살면서 나는 18번의 이사를 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대 간 2년은 이사로 치지 않는다. 즉, 26년의 절반 이상을 이사라는 행사와 거주지의 이동으로 겪어왔던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사정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집안 경제.
경제 사정이 나빠서 이사를 했다-라는 것도 때로 틀린 이유는 아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집은 어머니의 집을 보는 능력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다.
무슨 말이냐면, XX동 AA아파트를 샀다고 치자. 25평에 5천만원.(옛날이니까.)
그곳에 입주하고 반년 뒤에 보니 이 집이 8천만원으로 올랐다. 그리고 건너 건너 동네의 BB아파트의 값은 그대로다.
그러면 이 집을 팔고 이사를 한다. 혹은 양도소득세 때문에 전세를 가거나 기타등등...
이런식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그 재산을 조금씩 불려나갔다. 그리고 덕분에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평범한 중상권의 가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뭐, 재산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거니까.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사람도 있는 반면 적더라도 만족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 적어도 나와 어머니는 현재의 우리 집안 경제를 만족해하며 사는 중이다.
이렇듯 직장을 그만두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이사를 통해 빚덩이이던 이 집안을 평화롭게 만든 어머니의 수완 등은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요소이다. 향간에 따르면 여자에게 이사란, 남편과 사별하는 것과 동등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준다는데 내 어머니는 그러한 행위를 15번이나 하셨으니 말이다... (헷갈릴까봐 말하자면, 앞서 말한 18번은 내가 자취를 하는 동안 발생한 3번의 이사를 포함한 것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그나마 일산에서 쭉 살아오던 내 동생과 달리, 부산 포항 서울 일산 수원 서울 등등 오만 곳을 돌아다닌 내게 소꿉친구따윈 꿈에도 나오지 않는 환상향의 존재고(남자든 여자든) 지방에서 올라 온 아이의 차별과 따돌림 등도 겪어보고, 나름대로 짜증 만점의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친구를 만들어 봐야 곧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당시에는 사교성도 전혀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소설과 만화책만이 내 위안거리였지.
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우리 집은 이러한 특수성을 실천시킬 만큼 특이한 가족이다보니 남들이 평범하게 경험하는 어머니의 집안 살림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점에 대해 불만이 있냐면 다행히도 우리 집안 자식 놈들은 그런 것에 불만을 느낄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지 못해서 그러려니 하고 살았었지만.
나이를 점차 먹으며 다른 친구들 집에 갈 때 라든가, 전해 듣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확실히 우리 집이 다른 집과는 많이 다르구나- 하며 재밌는 감상 정도를 느낄 뿐이었다.
구구절절히 신상에 관해 쓴 이유는 이쯤이면 납득 할지 모르겠다.
요컨데 우리 어머니는 흔히들 알고 있는 어머니상과는 많이 다르신 분이라, 집안에 대한 어머니의 행동 같은 건 자주 보기 힘들었다. (어머니와 나의 명예를 위해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기에 불만을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불편은 느껴봤지... 설거지라거나 < )
그런 내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어!!!
그것도 시원한 코발트 블루의 색이 띈 앞치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다살다 이 집에서 앞치마라는 물건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왠 앞치마에요?" 라고 묻자 "왠 앞치마긴, 앞치마 입는게 이상하냐?" 라고 답하신 어머니.
"아뇨,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는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위에 이상할 게 뭐있나요. 그저 내 평생 보지도 못하던 거니까 그렇지."
"평생 입은 적이 없으니까 못봤겠지!(웃음)"
"ㅋㅋㅋ. 그러게 왠 앞치마예요? 이 집에서 앞치마 입고 있는 어머니를 볼 줄은 몰랐네."
"나도 이제 새해부터는 바르게 살아보려고 그런다. 왜."
커피포트 안의 물이 다 끓었다.
"며칠이나 갈지 봅시다."
모카 믹스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짜샤, 그럴 땐 '어머니께서 앞치마를 두르시고 매일매일 맞이할 수 있도록 기대할게요.' 라고 해야지. 글 쓰는 놈이 말의 힘을 몰라?"
"말의 힘이야 늘 제가 강조하는 거니까 잘 알죠. 다만, 세상에서 제일 못믿을 말이 새해 다짐인 거 모르..."
"시끄러웤ㅋㅋ 아들이 되가지고 매일매일 자라나는 새싹인 어머니를 응원은 못할 망정!"
"ㅋㅋㅋㅋㅋ. 자라나는 새싹이라 말하는 어머니의 새해 다짐을 어떻게 진심으로 믿고 응원하겠나요! 오히려 부질없는 환상은 바로 잡아주는 것이 아들의 도리지!"
"시끄러, 안들려. 그런 게 신뢰라는 거야 짜샤."
"ㅋㅋㅋㅋㅋㅋㅋ 신뢰도 이룰 때나..."
"시끄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겠사옵니다. 그럼 앞으로 어머니가 매일 앞치마를 두르는 모습을 꼭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보도록' 하지요."
"그래, 그러면 된 거야."
새삼스러운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헛소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어머니가 참 좋다.
작업하느라 집중하고 있는데 사은품 받은 걸 자랑하러 들어오는 경우만 빼면 말이다.
태그 : 어머니





최근 덧글